2000년 서울 반포, 그를 처음 만났던 날
초등학교 4학년 때 권갑룡 바둑도장에서 기숙생활을 시작하며 이세돌 9단을 처음 마주했다.
나보다 3살 위인 형이었으므로,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던 그는 이미 국내외 대회를 휩쓸던 세계적인 스타였다.
기숙사 2층 방에서 바둑 3점을 깔고 뒀던 그날 저녁을 잊을 수 없다. 그의 포스, 아우라는 어마어마했다. 전광석화.. 내가 3분 고민해서 둔 수를 이세돌은 3초만에 대응했다. 거침이 없었다. 회초리 없이 사람을 혼내는게 가능하다면 이런 느낌일 것이다. 마치 나의 뇌를 부정당하듯 그에게 사정없이 혼이 났다.
2016년 서울 광화문, 설마했던 그날의 충격
LG생활건강에 갓 입사한 신입사원일 때 또 다시 이세돌을 마주했다. 내가 일하던 건물과 마주편에 있던 포시즌 호텔에서 역사적인 이세돌VS알파고 대국이 열렸던 것이다. 당시 인공지능의 실체를 정확히 몰랐던 나는 큰소리로 주변 사람들에게 이세돌의 5:0 승리를 예견했다. 그 당시 나에게 이것은 당연했다. 16년이 지난 그 당시도 이세돌이 풍겼던 아우라는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호랑이 굴에서 호랑이를 만났었던 기억을 평생 가지고 산다고 할까.
그런데 그가 졌다. 첫판은 질수도 있겠지... 두번째 판도, 세번째 판도 졌다. 여유만만하던 그의 표정은 점차 어두워졌고, 그의 당황한 표정은 내가 그를 처음 마주했던 그 모습과 흡사했다. 바둑의 신인줄 알았던 그가, 또 다른 신을 만났다. 인공지능이란 존재가 전세계에 임팩트를 가하던 순간이었다.
2019년 전라남도 신안, 인공지능 시대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보다.
이세돌의 AI 한돌과의 은퇴 대국 3번기가 열렸다. 3년간 많은 일들이 있었다. 구글 딥마인드의 알파고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수많은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들이 개발되었고, 중국은 이런 프로그램들을 바둑공부에 잘 활용하여 세계대회에서 한국을 앞지르기까지 하였다. 이제는 모두가 인공지능이라는 존재를 인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세돌이 이기기는 힘들다는 예상들은 하고 있었다. 그래도 3년전 알파고와의 제 4국에서 보여줬던 '78수 신의 한수'의 기적을 이세돌이 재현해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실제로 1국에서 '제 2의 신의 한수"라는 평을 들을 정도의 묘수가 나왔다. 심지어 번호도 78수로 똑같았다. 마치 아침드라마에서 대본을 짜놓고 78화에서 극적으로 잃어버렸던 엄마를 만난 것처럼.. 극적인 승리가 이뤄졌다. 언론에서도 이를 멋지게 포장해주었다. 떠나는 영웅의 마지막 모습을 축복해주기 위해서. 그런데 이세돌은 1국이 끝나고도 이를 기뻐하거나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이겼지만 자신만의 바둑이 아닌, 이기기 위한 바둑을 두어서 아쉽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 3국에서는 자신만의 바둑으로 이겨보고 싶다는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실제로 1:1로 팽팽히 맞선 3국에서, 이세돌은 자신만의 바둑인 "전투 바둑"을 택했다.
결과는 패배였지만, 굉장한 전투승부로 끌고가서 자신만의 바둑을 두었다. 위 사진에서 중앙에 흑돌로 백 석점을 뒤집어 씌운 수가 이를 증명하는 수일 것이다. 떠나는 장수의 마지막 호령이 아닐까. 비록 내가 질 수는 있지만 허리를 굽히며 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돋보인 수였다. 자신의 형세가 강하지 않지만 마지막까지 적의 혼을 뺏어놓는, 이세돌만의 매력이 돋보인 제 3국이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인간이 승부에 졌지만 아름다운 이유가 아닐까.
"인공지능에게 승부를 질 수는 있지만, 정신은 질 수 없다."
인공지능은 강력한 도구이다. 특히 승부의 세계에서 이보다 강력한 도구는 찾기 힘들다. 프로기사들도 이를 인정하고 있고, 오히려 인공지능을 스승으로 삼아 공부를 하고 있다. 이제 인간은 인공지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내 생각에 이세돌이 제시한 마음가짐은 중앙을 씌운 수가 아닐까 한다. 그는 1국 직후 인터뷰에서 인공지능을 이긴 78수를 프로라면 누구나 둬야할 수라고 단정지었다. 오히려 그는 비록 바둑에서 패했지만 자신만의 기백을 드러낸 수를 더 높이 평가하지 않을까. 이것이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가 인공지능을 이기려 하기 보다는, 도전정신을 바탕으로 인간만의 색깔을 더 내야 한다는 교훈이 아닐까 생각한다.
진정한 인공지능 시대의 도래를 맞이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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